밴쿠버의 메모들

2020. 11. 7. 16:46In the Box

1. 처음 왔을 땐 그저 답답하게만 느껴지던 주황색 조명이 이제는 따뜻하고 아늑해서 좋다.
확실히 공부나 일할 땐 하얀 조명이 좋지만 이 동네 사람들은 집에서 오래 공부하거나 일할 일이 별로 없어서 집엔 하얀 조명을 잘 안 쓰는 걸까? 저녁 무렵 선셋 비치를 걷다 보면 하나둘씩 켜지는 주황색 불빛이 따스하고 여유로워 보여 좋다.

2. 해외 생활을 하다보면 국내에서 지내는 것보다 압축적인 경험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잦은 것 같다. 해외에 있기 때문에 더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게 되는 것보다 (물론 그런 일도 많지만) 국내에서도 겪을 일이지만 국내에서라면 1년에 한 번쯤, 아니면 3년에 한 번쯤 올 일이 일주일마다 몰아치게 되는 것. 어차피 일어날 일이 촉발만 조금 빠른 것이라고 하기엔, 정신을 차릴 틈을 주지 않고 휘몰아치는 상황은 어느 누구에겐들 쉬우랴. 어차피 일어났을 일이더라도 그것들의 결과도 같을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겠다. 
2-1. 해외 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느낌이 있다. 타인에 대한 기대가 낮고 본인 삶에 대한 집중도가 높은 느낌. (가치 평가 X)

3. 내 성격도 내가 선택한다는 것. 당연히 오로지 나의 선택만의 결과는 아니지만, 생활이 안정된다면 기본적인 것이 충족된다면 내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하는지 나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지는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유가 된다면 그렇게 살아갈 수도 있겠구나(혹은 그렇게 살아오고 있었구나), 하는 놀라움과 씁쓸함도 조금 있었고 나는 지금껏 어떻게 만들어왔는가를 좀 돌이켜 보게 된다. 회사 친구와 화났던 일을 얘기하며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도 즐겁고 속 시원했고 그런 것들이 종종 필요하다는 것도 알지만, 여유롭고 관대한 모습이 아무래도 더 낫겠어.

4. 달리기, 채워야 하는 시간을 다 채워야만 한다고 생각했는데 채우지 못해도 그다음 러닝에서 한 단계 올라갈 수 있었다. 어느 정도는 버티고 참아내야 하지만 꼭 100을 채우지 않더라도 다음에 120을 할 수 있다는 것. 머리로만 알고 있었지만 몸으로 체득하니 더 오래 기억이 남는 것 같고 절대 잊어버리지 않을 것 같아.

5. 아주 큰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내게 중요한 것을 가늠하게 된다. 나는 내 인생도 중요하지만, 엄마의 딸 고양이의 보호자 애인의 애인 친구들의 친구로서의 나도 중요해. 인간은 단수가 아니라는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 나는 단수가 아니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의 나도 나를 형성하는 아주 중요한 나s 중 하나란 걸 체감한다. 캐나다에서의 내 모습이 좋지만.. 모든 걸 다 가질 순 없겠지요. 내게 어떤 것이 중요한 지 그걸 깨닫고 곱씹고 생각하는 시간.

6. 쉽게 이뤄지지 않을 바람이기에 입 밖에 내지 않는다. 그게 좀 슬퍼서 눈물이 났다. 

7. 내 말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본다. 대화를 했지만 대화가 이뤄지지 않은 느낌. 한국에 있을 때보다 캐나다에 와서 만난 사람들에게 더 많이 느끼게 되는데, 본인의 용량에 비해 살아가는 데 힘을 더 많이 쏟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회적 자아가  있으니 이런 저런 말을 하긴 하는데 그게 나와의 1:1 소통이 아니라 그냥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대화인 듯한 느낌. 그리고 나도 그렇게 대화 주제를 고르고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대화를 나누는 게 아니라 너와 나의 공간을 채우기 위한 이슈를 고르고 기계적으로 말을 이어나가고, 그러다보니 이 얘기를 내가 누구에게 했는지 이 사람이 내게 어떤 얘기를 했는지 기억하지 못 하고 가끔은 반복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나도 그렇고 어떤 느낌인지 약간은 알 것 같지만, 그럼에도 가깝다고 생각한 사람이 내가 했던 이야기를 전혀 기억하지 못 하는 일이 반복되니 그건 좀 속상하다. 벽에 대고 말하고 벽이랑 인사하고 또 벽이랑 만나서 말하는 느낌. 마음을 썼던 사람이니까 그게 오고 가지 않는다는 게 속상한 거겠지. 
여기에서는 사람 간의 거리를 벌리는 일이 쉽지 않다. 돌아가야겠다 생각한 이유 중 하나도 그렇다. 내 기반이 있는 곳이 아니기에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한정적일 수밖에 없단 것. 여기에서는 사람들과의 건강한 거리를 지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리고 동시에 힘들 때 SOS를 칠 수 있는 사람이 적다. 한정적인 사람들에게 내가 너무 딥하게 기대거나 기대하게 되거나 내 정신 건강을 지키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오는 게 어렵다. 

8. 달리기를 하면서 달리기는 명상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명언 따위를 질색하는 사람에 가까웠는데, 말로만 들었을 때는 오글거리고 말은 누가 못 해; 하는 그런 냉소적인 면이 있다. 그런데 뛰면서 몸으로 마음으로 느끼는 떠오른 얘기를 정리해보면 다 어디서 들어본 말이고 내가 질색하던 그런 명언류의 이야기인 거야. 페이스 5로 1시간을 달려도 지금은 달리지 않는 사람보다 7로 30분만 달릴 수 있어도 꾸준히 달리는 내가 나은 거지. 좀 더 나아질 수 있고 지속하고 있으니까. 후자의 방향으로 내 삶의 방향을 잡아야겠다는 건, 문장만 보았을 땐 들지 않았던 생각. 

9. 아오이와 Savio volpe에 갔던 날, 술도 뭣도 아무것도 안 했는데 붕 떠있는 기분이 들고 마치 영화 속에 들어온 것처럼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 보여서 기록. 주변의 소음도 먹먹하게 들리고 영화 속에 들어가 그 장면을 관찰하는 사람이 된 기분이다. 오렌지 빛으로 가득한 레스토랑 안에 행복하게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표정과 모습이 꼭 플래시백 장면처럼 보이고, 신기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10. 토론토에서 있었던 일. 너무 추워 혼자 바에 들어가 와인이랑 크렘 브륄레를 시켜 먹으면서 편지를 쓰고 있을 때, 서버가 와인을 주러 와서는 한글을 보고 깜짝 놀라며 너무 예쁘다고 하길래 한국어라고 대답해줬다. 나 보고는 어떻게 한국어를 아느냐고, 한국에서 태어났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곳에서는 내가 말하지 않으면 나도 이곳에 속하는 사람으로 간주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기본. 언제나 이방인이었고 아마 이곳에 산다 할지라도 평생 이방인이겠지만, 동시에 캐나다에 도착한 순간부터 캐나다 사람으로 간주되는 것. 여러 인종과 민족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굉장한 자산이구나, 어렴풋이 느꼈고 또 조금 부러웠다.

11. 떠나기 하루 전.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아마도 아직 내가 떠나야 하고 다시 내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인 것 같다. 긴 휴가가 끝났다는 걸 인정하자. 적게 벌고 많이 쓰고 시한부였기 때문에 불안정한 상황에서도 적당히 안정적으로 너무 불안해하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는 것도. 이제는 현실로 돌아갈 시간. 밴쿠버를 제2의 고향으로 땅땅 도장을 찍고 아쉬운 마음 잔뜩 두고, 좋은 기억만을 남기고.
행복한 삶에 대해서 생각하고 어떻게 그걸 내 삶으로 끌어올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잘 생각해보자. 뭐 그 답이 뿅 나왔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내가 좋아했던 밴쿠버 자아가 너무 빨리 흐려지지 않도록 노력해보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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