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대하여 ② 영화와 기호

2015. 1. 27. 03:05Like/Study

영화에 대하여를 대하기 앞서 영화 수업을 들었고 마음에 들어서 패기롭게 두 수업을 아울러 정리를 해보겠다고 글을 쓰고는 있다만 나는 영화에 대해 잘 모른다. 다시 읽고 공부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보다 배웠던 것들을 즐겁게 기억하기 위해 쓴다. 

 

출처는 그때그때 글에 밝힐 예정이지만 전체적으로 연.세대학교 서.현석 교수님의 영상제.작이론과 이윤.영 교수님의 영화예.술의 이해의 수업을 바탕으로 한다. 수업 필기를 바탕으로 정리한 글이 될 것이니 전부 다 교수님들의 저작이고 나는 그저 공부하는 학생의 마음으로내 맴대로 정리를 후드리챱챱 할 뿐(!)  



참고논문: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1915-1980) <Leaving the Movie Theater(영화관을 나오면서)>[각주:1]


#1. 영화의 핍진성


영화는 카메라로 어떤 것을 찍어서 재현하는 매체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들은 현실의 모습과 꽤나 닮아있다. 핍진성(Verisimilitude)이라는 용어가 있다. 핍진성이란 '그럴듯함' 혹은 '있음직함'이라는 뜻으로 사진, 회화, 영상 등으로 묘사할 때 그럴듯한, 그 이미지가 현실과 가까운 정도를 얘기한다. 새로운 이미지의 발현 방식인 영화를 지켜본 몇몇 학자들은 영화에 기호학을 도입했다. 


이번엔 기호학이나 그에 관련된 용어나 개념들을 정리하며 그 흐름과 문제의식을 따라가 보려 한다.


기호학의 가장 기본적인 대상은 '가리키는 것'과 '가리킴을 당하는 것'이다. 


기표(Signifier, 능기, 시니피앙): 가리키는 것, 의미하는 것

기의(Signified, 소기, 시니피에): 가리킴을 당한 것, 의미되고 있는 것


예컨대 '사과'라고 하는 문자는 빨갛고 동그랗고 새콤한 그 과일을 가리킨다. '사과' 나 이 문자를 발음하는 음성, 혹은 사과를 그린 그림이나 그런 이미지는 바로 그 과일을 가리키는 기표(시니피앙)이고 그러한 기표들이 가리키고 있는 대상은 기의(시니피에)다.




#2. 메츠의 영화기호학


크리스티앙 메츠Christian Metz(1931-1993)는 기호학자는 아니지만 영화에 기호학을 처음 도입한 사람이다. 그는 두 차례에 걸쳐 영화를 기호로 설명하고자 했다. 두 번의 연구의 공통된 전제는 영화 스크린이 기표라는 것. 왜? 영화는 대사가 없을 때에도 우리에게 의미를 전달할 수 있고, 이미지를 통해서 우리와 소통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정도 의도된다.


1. 60년대 중반 연구 - 영화는 언어인가?


60년대 프랑스에는 구조주의가 확산되었다. 구조주의는 어떤 사물의 의미는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 특히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에 따라 규정된다는 인식을 전제로 사물의 의미, 개인의 행위, 사유, 인식 등을 궁극적으로 규정하는 총체적인 구조와 체계에 대해 탐구하고자 하는 현대 철학 사상의 한 경향이다. (참고로 롤랑 바르트는 탈 구조주의)


그 구조주의의 인식적 기틀을 만든것이 바로 언어학자 소쉬르다. 소쉬르는 언어를 '관념을 표현하는 기호의 체계'로 보았다. 그는 기호체계가 어떻게 구조화되어 있는지를 밝혀내고자 했다. 그런데 기호의 두 가지 측면인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어떤 필연적 연관성도 존재하지 않고 임의로 연결된다. '사과'라는 기표와 그로 인해 떠오르는 이미지, 기의 사이에 직접적인 연결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약속일 뿐이라는 것. 즉 기호는 사물과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언어 체계 안에서 다른 기호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고 그 의미는 전체 체계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각주:2] 


영화는 어떨까? 영화도 기표와 기의가 있으니 언어라고 볼 수 있는가? 메츠는 이러한 소쉬르의 이론은 영화에 적용해보려 했다. 영화를 보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영화 속에서 나타나는 광화문과 우리가 그것을 보고 떠오른 광화문의 이미지는 닮아있다. 즉 영화의 기표(스크린)와 기의는 임의적이지 않고 핍진성이 있다. 소쉬르의 이론을 적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소쉬르는 언어, 그 중에서도 프랑스어에 한정해 그의 이론을 펼쳤다. 메츠의 첫 번째 연구는 실패했다.


2. 70년대 초반 연구 - 영화는 언어화되기 이전의 어떤 것들이 아닐까?


메츠는 70년대에 들어와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에서 힌트를 얻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언어에 비유했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 되어 있다") 영화 이미지가 기표인 것은 맞다. 그러나 소쉬르가 말한 기호체계처럼 체계화(구조화)된 것이 아니라 암묵적으로밖에 동의할 수 없는 애매한 어떤 것에 의해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메츠는 라캉의 개념을 가져와 영화를 '상상계적 기표'라고 본다.



잠시 라캉과 그의 개념들에 대해

자크 라캉Jacques Lacan(1901-1981)은 탈구조주의 학자로 1950,60년대를 거치면서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제창했다. 프로이트는 사망 이후 3,40년 동안 굉장히 강력한 영향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잊혀 버리고 오해받은 부분이 많았는데(프로이트는 성결정론자다!) 라캉은 프로이트로의 제대로 된 접근법을 되살리려고 했다. 아주 흥미롭지만 아주 어려워서 배워도 배워도 까먹는 학자닿ㅎ.. 일단 그의 개념만 뽑아서 간단히 설명하고 넘어가자.


우리는 현실을 그대로 체험할 수 있을까? 니체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우리의 감각을 통해서 아주 특정한 표면, 기호, 자극만을 받아들일 수 있을 뿐, 그것-현실을 넘어선 또 다른 세상이 있을 수도 있다. 라캉이 이를 받아들여 세 가지 개념을 제시한다.


- 상징계the symbolic: 우리가 배운대로 보는 세상. 언어를 처음 배우면서, 신체의 기호를 배우면서 상징계에 돌입한다. 

- 상상계the imaginary: 상징계에 돌입하기 전의 세상. 그 영역의 부수적인 체험으로서 주로 지각적인 활동. 전적으로 이미지의 세계.

- 실재계the real: 라캉은 우리가 체험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상징계와 상상계 너머의 것, 감각과 언어 그 이상.


이 세 가지 영역이 인간의 의식 체계를 구성한다. 





60년대 중반 첫 번째 연구에서 메츠는 영화가 상징계적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밝히려고 했다. 그러나 실패하고, 다음 연구에서는 언어화되지 않은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영화에 언어화되지 않은, 그 이전의 것들이 있을까?


그 증거로 

영화는 어두운 곳에서 본다: 어두운 공간은 생각 자체를 퇴행적으로 돌아가게 한다. 영화는 어둠을 기반으로, 무엇인지 정확하게는 말할 수 없는 그런 암묵적인 것을 전달한다. 그것은 기표화되지 않은, 우리의 원초적인 욕망같은 어떤 원시적인 표현 형태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영화는 꿈과 비슷하다: 다른 정신활동들과 비교했을때, 영화는 환할 때 하는 정신활동과는 다르다고 보았다. 오히려 무의식 속의 꿈과 비슷하다. 어둠 속에 있고 움직이지 못하고 스크린/꿈에 보여지는 내용에 개입하지 못한다. 영화는 꿈과 같은 구조를 통해 우리의 무의식적인 욕망을 소통하기에 이른다.



그러면서 메츠는 우리가 왜 영화를 보는가에 대한 질문에 몇 가지 키워드를 제시했다.


1. Scopophilia(절시증) 

메츠는 영화는 한마디로 매혹lure이라고 했다. (바르트도 이에 대해 동의했다. 그는 영화 자체의 매혹과 '영화관을 나오면서' 느끼는 매혹에 대해 이야기했다.) 필리아는 성애/사랑/집착, 스코프는 보는 것의 의미로 스코포필리아는 보는 것으로부터 쾌락을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각주:3]. = 보는 즐거움, 시선에 대한 애착. 


메츠는 이러한 정신분석적인 용어를 영화학에 도입했다. 우리가 왜 영화를 보느냐고? 그야 보는 것 자체가 즐겁기 때문! 이라는 것이다. 영화는 절시증, 보는 즐거움이라는 원초적인 욕망을 충족시켜 준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아주 오래된 기억 속의 모습, 욕망으로 퇴행한다. 영화관이라는 건축적 공간(어두움)도 그러한 잠재된 기억을 발산하게 해준다. 그래서 영화에 더 '꽂히게' 만든다. 


당시에 시네필리아cinefilia[각주:4]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그러한 현상이 있었다. 단순히 영화를 좋아하는 팬이 아니라 '장르를 불문하고, 영화 자체를 각별히 사랑한다'라는 의미로 쓰이는 한편, 야유과 자학의 의미를 담아 사용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덕후. 요즘 용어로 바꾸자면 '영화덕후'가 가장 적절할 듯 싶다.


2. Voyeurism(관음증)

관음증은 절시증의 하나로 몰래 훔쳐보고 싶은 욕망과 그에 사로잡히는 것을 말한다. 영화 관람은 일종의 관음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우리는 어두운 곳에서 스크린을 본다. 스크린 속의 누군가를 훔쳐보지만 스크린 속의 사람들, 그리고 누구도 나를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몰래 훔쳐보는 것이다.[각주:5]


3.Fetishism(성도착증) 

바르트는 "나는 한 마디로 말하자면 아주 까다로운 페티시스트이다" 라고 말한 바 있다. 메츠는 영화에 꽂힌 사람들은 모두 페티시스트(성 도착자)라고 까지 말했다. 그들이 말한 '페티시스트'가 보통 알고 있는 그 '성 도착증 환자'를 말하는 것이 맞을까?



이럴때 페티쉬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고양이 발... 찹쌀떡....



일단 단어 해석부터 해보자면, 페티시즘Fetishism은 우리말로 성 도착증 혹은 물신주의로 해석된다. 몸의 일부나 옷가지(속옷), 혹은 소지품 따위에서 성적 만족을 얻는 이상 성욕의 하나(초록창 국어사전 참고)가 보통 쉽게 떠올리는 페티시즘일 터. 물신주의는 물신 숭배, 종교적 의미로 사용되거나 마르크스의 상품물신주의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단어다.[각주:6]


이러한 페티쉬의 어원은  콩고에서 왔다고 한다. 포르투갈이 서아프리카를 침략했던 16-17세기 쯤에 그들은 서아프리카에서 '비서구적'인 물건을 발견한다. 주로 주술적인 의미가 있는 것들, 숭배의 대상, 성물, artifact을 페티쉬라고 불렀는데 그것이 페티시즘의 기원이다.[각주:7] 서구와 비서구가 만난 것은 그러나 그 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로부터 100여년 전, 서구가 금을 찾으러 와서 기독교를 전파했고, 금을 찾을 수 없자 다시 후퇴했던 역사가 있다. 서구가 진출하기 이전에 아프리카에는 각 나라의 무속신앙과 전통이 있었지만, 서구는 이를 금지하고 기독교적 문화를 전파했다. 그리고 돌아갔다가 100년 후 다시 이 지역으로 들어왔을 때 페티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학자들은 나무목각이나 동물가죽 등에 못을 박아 놓는 등의 모습의 성물을 토속신앙과 기독교가 혼합된 문화의 결과물이라고 본다. 기독교의 순교와 관련된 이미지이지 않을까 추측하기도 한다고. 이것을 일컬어 페티시즘, 한국에서는 물신주의라고 번역했다. 기원에는 흔히 생각하는 성적인 의미는 없었던 것이다.



그 맥락이 19세기에 와서 성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정신분석학에서 페티시즘은 성적인 대상을 물건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프로이트[각주:8]에 따르면 '나'라는 개념을 인식하고, 그 개념이 우주의 중심이어야 하는데 여성(엄마)의 신체를 본 순간 '나'에게 있는 것(페.니스)이 엄마에게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여성의 신체가 '나'와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고 원래 있었는데 잘렸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것은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온다. 신체가 잘렸다는 것, 그리고 우주의 중심이어야 할 '나' 역시 손상될 수도 있다는 것 - 즉 공포, 트라우마를 갖게 된다.[각주:9] 


이러한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서 '나'는 엄마의 신체가 잘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남근처럼 돌출성을 가진 부위나 그것을 닮은 소지품(립스틱이라던가), 혹은 충격적인 장면(남근이 없는)을 보기 전에 보았던 소지품(속옷 등)을 여성(엄마)의 남근이라고 생각한다(=부인) '나'의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일종의 환상(fantasy)을 만들고 그를 지탱해 줄 물건이나 다른 신체부위, 대체물이 필요한 것이다.


초록창에 따르면 페티시즘은 '여성이 페니스를 거세당했다는 인식에 따른 공포로 인해 여성이 거세된 점을 부인(verleugnung, disavowal)하는 일종의 무의식적 방어로 대부분 남성[각주:10]에게서 나타난다'고 나와있다. 부인은 부정과는 다르다. 부정은 100% 아니! 지만 부인은 아니라는 가능성을 나타낸다.



드디어 다시 메츠로 돌아와서, 메츠가 사람들(여자든 남자든)이 영화, 스크린에 '꽂힌다'는 것을 페티시즘으로 설명한 것은 바로 '부인'이라는 개념때문이다. 우리는 영화 속의 어떤 상황들이 현실이 아닌 허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이지 않을까? 진짜일 수도 있다'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현실판단을 유보하며 허구라는 사실(이미 눈과 뇌로 확인했지만)을 '부인'한다. 왜? 그래야 영화가 더 재미있을테니까. 공포영화의 귀신을 보면서 비명을 지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는 귀신이 배우인 것을 알고 있지만 영화를 볼 때는 그러한 현실판단을 유보한다. 


메츠는 성욕과 관련된 페티시보다도 그것에 대응하는 부인이라는 정신활동에 대해서 이야기 한 것이다. 



#3. 롤랑 바르트가 좋아한 '영화관을 떠나는 순간'


바르트는 자신을 '까다로운 페티시스트'라고 표현했다. 이는 메츠의 말처럼 영화에 매혹당하는 페티시스트이지만 영화에 푹 빠지는 것이 아니라 매우 까다롭게 영화를 판단하고 매혹된다는 것을 뜻한다. 바르트는 영화의 내용보다는 영화의 물성에 주목했다. 그는 영화관의 이미지가 자신을 현혹시키고 동일시 하는 순간이 좋은 것이 아니라 한 발자국 떨어져서 '그러한 영화의 페티시즘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작동하는지'를 보는 것이 아주 매혹적이고 그로부터 페티시즘적인 쾌락을 느낀다고 말한다. 바르트는 바로 이것을 영화관을 나오는 순간Leaving the movie theater이라고 표현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바르트가 "영화=최면"이라고 한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바르트는 영화가 마치 최면과 같다고 얘기하고 있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사람들은 종종 혹은 자주 몽롱함을 느낀다. 이러한 몽롱한 현상은 심리적이기도 하지만 신체적이기도 하다영화라는 기호체계는 심리적으로 소통하는 문화 응집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신체적인 체험(시간적이며 공간적인 체험)이다


먼저 메츠가 지적한 것처럼 '어둠'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그는 영화관이라는 공간적 특성에 매우 주목하는데 매우 어둡고 익명적이고 무관심적인 네모상자(영화관) 안에 자기 자신을 고립시키고 홀로, 자세 조차도 늘어진 상태로 유일한 빛을 바라본다. 빛은 계속해서 변하면서 일렁이고 이는 마치 공간이 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다른 사람 없이도 나 홀로 어두운 공간 속에서 하나의 이미지를 보면서 늘어진 상태에서 가상현실을 꿈꾸듯이 나의 욕망에 충실하는 몽상적인 상황[각주:11], 최면과 비슷하지 않은가[각주:12]


그리고 체험할 때는 모르지만 체험한 후 이해된다는 것 또한 그렇다. 스크린을 보고 있을 때는 무엇인가에 도취되고 몰입되어 성찰할 시간조차 없다. 바르트의 글은 공간에 대한 글이기도 하지만 모순적인 시간에 대한 글이기도 하다. 보여지는 이미지는 과거형이지만 영화를 체험할 때는 눈 앞에서 그 일이 벌어지는 것처럼 느낀다. 현재형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지만, 체험이 끝난 뒤에 깨닫는다. 이미지들은 과거이고 또 체험이 끝난 후에 회상을 함으로써만이 이해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몰입되는 것만으로 최면 효과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영화는 너무나도 사실 같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메츠가 말한 '부인'을 떠올려 볼 수 있겠다. 영화의 페티시즘적인 요소가 영화를 최면적으로 만들고 사람들은 부인과 인정, 현실과 현실 아님의 사이에서 몽롱한 최면 상태에 빠져드는 것이다.


그러한 최면 상태는 영화의 텍스트, 의미체계안에서 이루어지기보다는 영화가 현존하는 공간, 시간으로부터 온다. 보통 사람들이 영화를 볼 때 텍스트에 빠져든다면, 바르트는 그러한 영화의 의미체계가 아닌 영화의 물성, 현존감의 영역을 바라본 것이다. 그것이 바로 바르트가 제시한 영화로부터의 거리두기, 영화로부터 멀어지는 것, '영화관을 나오는 순간'인 것이다. 그의 논문 제목인 <영화관을 나오면서>는 중의적으로,  영화관이라는 건물에서 나가는 것 영화가 갖는 흡인력에서 거리두는 것, 두 가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거리두기'라는 단어에서 브레히트의 거리두기(소격효과)를 떠올리게 되지만, 바르트는 중점을 둔 거리두기는 그와는 다른, 새로운 개념이다.


- 브레히트적인 거리두기는 학자로서 거리를 두는 냉철하고 비판적인 거리두기다. 영화뿐 아니라 연극 등의 영역에서도 많이 나타난다. 


- 그가 이야기하는 거리두기는 an amorous distancing(한국어 번역판에는 '사랑에 빠진 거리두기'로 번역되어 있다.)으로, 영화의 흡인력에 마구 빠져드는 것과 브레히트적 거리두기(비판적 거리두기)의 중간쯤 되는 거리두기다. 어느정도 도취되도록 두는 것이지만 그 도취의 대상이 영화의 텍스트나 배우, 혹은 의미체계인 것이 아니라 영화의 '물성'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때로 우리는 영화관의 기둥, 먼지, 조명의 움직임, 흘러가는 시간 등 물질적인 것에 집중하게 되는데 그런 순간, 영화를 보고 있는 '나'의 모습이 인식되고 영화가 나에게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영화관을 나오는 순간'이며 바르트가 아주 매혹적인 순간이라고 말한 바로 그 순간이다.



바르트는 논문을 시작할 때 your speaker라던가, he, himself(한국어 번역판에는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주체', '그는') 등의 단어를 사용하는데 그 대상은 바로 롤랑 바르트 자신이다. 나, 라고 표현하지 않고 제3자를 이야기하듯 한 것은 이 글 전체적으로 '나'의 체험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함이라고 한다.



바르트는 기호가 언어에 국한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시각뿐 아니라 다른 감각에도 기호 작용은 일어날 수 있으며, 즉흥적이고 물질적으로 우리가 접하는 모든 것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보았다. 그는 의사소통을 이루는 모든 것은 기호라고 보았고, 영화나 사진, 회화도 모두 기호 체계로 보았다. 바르트는 언어적인 질서에서 벗어나 현존감presence에 집중하고 현존과 재현에 대해 연구했다. 영화에 대한 그의 시선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롤랑 바르트의 저서 <밝은 방camera lucida>의 목차는 언어적 질서를 벗어나기 위해 매우 괴상하게 구성되어 있다. 논리적 체계를 파악하기 어렵다. 그래서 읽기도 어려웠던 것 같다.......)




_ 끝





영화에 대하여 ①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 빛의 방

영화에 대하여 ② 영화와 기호 I







덧. 주섬주섬 옛날 필기를 찾아 끄집어 냈다. 공부 제대로 해둘걸 이라는 생각은 꾸역꾸역 집어넣음..... 그래도 재밌네

덧2. 첫 글이 올라가고 열흘 후에, 뒷부분을 추가해서 재발행.




  1. DBpia(http://www.dbpia.co.kr/)에서 볼 수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이나 협력도서관 회원이어야 원문을 이용할 수 있는 것 같다. [본문으로]
  2. [네이버 지식백과] 구조주의 [Structuralism, 構造主義] (두산백과)) [본문으로]
  3. 프로이트로부터 온 개념이다. 보는 것으로부터 쾌락/성욕을 얻는 것은 인간의 직립보행과도 연관이 있다. 동물은 네 발로 다니기 때문에 성기를 보기보다는 냄새를 맡음, 즉 후각과 더 밀접하지만 인간은 직립보행, 눈으로 성기가 보인다. 시각 자체가 성욕과 아주 긴밀하게 인연을 맺는다고 말했다. [본문으로]
  4. 영화 <몽상가들>이 이러한 당시 사회현상을 보여주고 진단한다. [본문으로]
  5. 영화는 이러한 사람들의 관음적 환상을 깨지 않기 위해 여러가지 법칙을 사용한다. 영화 속 인물들이 카메라 정면을 바라보는 것은 기본적인 금지원칙이다. 30도 법칙이라는 고전적인 기법이 있는데 살짝 비틀린 각도에서 촬영하면 더욱 훔쳐보는 듯한, 적절한 거리감과 적절한 몰입감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고전 법칙을 깨는 영화들도 많다. [본문으로]
  6. 마르크스의 상품물신주의는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인간이 만든 상품을 인간이 숭배하게 되는 것이다. 화폐나 상품에서 노동의 의미를 망각하거나 거세하고 상품을 숭배하게 함으로써 노동의 착취는 은폐된다고 말하고 있다. [본문으로]
  7. 서아프리카 연안에서 15세기 중엽부터 교역활동을 시작한 포르투갈인은 연안의 부족들이 평소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있던 신적 자연물을 페티소(feitiço, fetisso)라고 총칭했다. 이 말은 포르투갈에서는 호부(護符)를 의미했다. 이후 18세기 프랑스의 비교종교학자 샤를 드 브로스는 아프리카에 한정하지 않고 세계 각지의 민족들에게서 볼 수 있는 크고 작은 다양한 생물 · 무생물로 이루어진 페티소를 숭배 대상으로 하는 원초적 신앙을 페티시즘이라고 명명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페티시즘 [Fetischismus, fetishism] (맑스사전, 2011.10.28, 도서출판 b) [본문으로]
  8. 프로이트에 따르면 페티시즘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소지품(의복, 속옷, 스타킹, 립스틱 등)에 도착을 느끼는 것, 그리고 성기가 아닌 다른 신체부위에 도착을 느끼는 것. 당시 19세기에 속옷이 크게 발달해 이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경우가 많이 나타났다고 한다. [본문으로]
  9.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지만 외디푸스(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 대한 내용이니 보다 깊은 내용은 따로 검색해 보는 것 추천. [본문으로]
  10. 프로이트가 이를 하나의 발달 과정으로 설명한 것은 맞다. 남성 위주로 설명해 여성의 경우는 잘 설명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으나, 라캉이 후에 이를 구조적으로 해석했다. - L 도식/대문자 타자 관련. [본문으로]
  11. 이것을 바르트는 Modern Eroticism이라고 불렀다. [본문으로]
  12. 게다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영화의 이미지는 현실과 매우 닮아있기 때문에, 즉 핍진성(Verisimilitude)을 가지기 때문에 더욱 현실감을 만들어내고 사람들은 그 안에 빠져들기 쉽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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