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5 DO THE NEXT RIGHT THING

2019. 11. 26. 00:26In the Box

 

파란만장한 지난 주말. 오늘이 고작 월요일이라는 것이 믿기지가 않네.

토요일 점심, 치노를 탁묘처에 맡기고 왔다. 이동장에 넣자마자 첫 목욕할 때만큼이나 서럽게, 악을 써가며 울던 치노는 생애 처음으로 30분 넘게 차를 타고 탁묘처에 실려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가서 빽 빽 화를 내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안녕 하고 엄마와 나만 집으로 왔다. 바리바리 싸들고 치노를 안아들고 갈때와 달리 차 안이 너무 텅 비고 조용해서 아무 말이나 마구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울진 않았다.

다음날 치노가 화장실을 갔다는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다행이었다. 내가 핸드폰을 잃어버린 것만 아니었으면.

 

치노를 데려다주고 온 날, H와 DD, 새로운 친구 J와 술을 마셨다. 난 돈이 없으니까 택시 안 타고 갈거야, 호언장담했지만 어쩐지 아무도 믿지 않더라니 정말로 제대로 만취해서 택시에 실려온 것도 기억이 안난다. ㅎ... 실소 타임... 즐거웠고 재미있었고 깔끔하게 마셨으나 핸드폰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H 것까지 두개를 몽땅, 나 혼자서. 나는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시고, (자랑은 분명 아니지만) 만취와 블랙아웃 콤보로 집에 온 기억을 잃은 적도 많았지만 한번도 뭘 잃어버려 본 적은 없었다. 특히 핸드폰은 단 한번도 잃어버린 적이 없는데, 두 개를 세트로 잃어버리다니. 불길한 예감이었는지 다음날은 정말 스프링처럼 튕기듯 침대에서 일어났다. 내 핸드폰이 없네, 뭐지. 어젯밤 온 카톡을 보니 H 핸드폰을 내가 가져갔다고? 그럼 내폰은 H가 가져갔나. 아니라네. 둘 다 내가 가지고 갔다네, 함께 술을 마신 사람들 아무도 우리 두 사람의 핸드폰을 가지고 있지 않다네. 

잠깐의 혼란 끝에 정리된 이야기는, 2차가 끝나고 만두집을 갔으며 (그것부터 기억이 없다), H 핸드폰으로 카카오 택시를 불렀고 나는 H 핸드폰을 그대로 들고 택시에 탔다고. 택시 기사 연락처를 알아내서 확인해보니 택시 안에 핸드폰이 있었다. 그런데 하나만 있대... 친구는 내 핸드폰이 더 비싸니까 차라리 내 핸드폰이면 좋겠다고 했지만, 택시 안 핸드폰은 친구의 핸드폰이었고, 마음은 아팠지만 차라리 다행이었지 뭐. 술 먹고 남의 폰 들고 택시타서 잃어버린 주제에 내 폰만 찾으면 친구 얼굴을 내가 어떻게 보냐고.

아무튼, 다행히도 친구 핸드폰은 찾았고 내 핸드폰이 문제인데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는 게 문제였다. 약간 자기혐오와 현타, 그리고 애써 희망적이려고 하는 마음가짐으로 나의 행적을 되짚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전날 갔던 가게들을 다시 한 번 다 가봤는데 없댄다. 가게에 없으면 거리에 흘려서 누가 가져갔거나 택시에서 누가 내것만 가져갔거나 뭐 그런건데 진짜 희망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희망을 못 버리고 LOST112와 핸드폰분실센터에 등록하고, 파출소에 계속 전화해보고 그러고 있는 이유는 내가 잃어버린 핸드폰이 기적적으로 싸게 산 아이폰X인데다 6개월도 안된 새폰이라서.... 내가 이 폰을 진짜 너무 좋아했어서..... 캐나다가서 사진 찍고 영상 찍을 생각으로 행복해하며 샀던 핸드폰이라서.......

 

아무튼 그렇게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애써 마음을 다잡고 옛날 폰을 꺼내고 (시발, 무한로딩) 유심을 새로 구하고 (시발, 알뜰폰 시발) 있는데 탁묘처에서 연락이 온 거다. 치노가 아무것도 안 먹고 있다고. 토, 일, 월 사흘 째였다. 3년 전쯤 가족여행 가느라 치노를 친구네 탁묘 맡겼을 때도 딱 3일 밥 안 먹다가 4일 째부터 밥 먹고 5일 째 집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는데 (그리고 5일째 저녁 집으로 옴) 왠지 비슷해 보였다. 눈 딱 감고 냅두면 사실 밥도 먹고 적응도 할 것 같긴 한데, 마음이 너무 아팠다. 너무 마음이 아파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 간다고 했다. 가서 부둥부둥해주고 캔 먹이고 와야지. 그리고 하루이틀 추이를 지켜보고 조금 더 적응을 시킬지 딱 일주일만 뒀다가 데려올지를 결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오늘, 애인이 치노와 핸드폰, 총체적 난국으로 멘탈이 파스스 해진 나와 놀아주었다. 사실 월요일은 대개 데이트하는 날인데 아주 타이밍이 좋기도 안 좋기도 했지. 나 혼자 있었으면 정말 파스스 해졌을텐데 그나마 애인이랑 있어서 괜찮았고, 내가 힘을 내다가도 갑자기 울적해지는 탓에 애인도 덩달아 우울해져서 안 좋기도 하고. 아무튼, 애인에게 나에게 찾아온 이 시련들을 이야기하면서 일단, 너무 멀리까지 생각하지 말고 (치노가 계속 밥을 안 먹을 경우, 최악의 경우 탁묘 취소될 경우, 핸드폰을 계속 못 찾을 경우, 워홀 등등)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겠다고 했다. 

사실은 캐나다 워홀을 생각하면서 요즘 늘 생각하고 있는 말이었다. 1년 후 어떻게 될지 어차피 모르는 걸 지금부터 굳이 고민하지 말자. 다녀와서 어떻게 일 할지 청사진이라도 그려야 하지 않을까 아니면 캐나다에서 일을 구할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어차피 지금은 모르는 것들이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도 있고. 그러니까, 일단 여러가지 방면으로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고민하고 하나씩 하나씩 해보기로, 당장 오늘의 일부터 해보기로 한 거다.

 

그리고 보러간 겨울왕국2에서 안나가 그러는 거야. DO THE NEXT RIGHT THING이라고. 안나랑 엘사 둘 다, 자신없지만 해야할 것 같은 일들,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고, 괴롭고 힘든 일을 하려는 때에 서로에게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말한다. DO THE NEXT RIGHT THING, 네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아니, 내가 겨울왕국 보고 싶긴 했는데 그래도 막 그렇게 처돌이는 아니었는데, 심지어 1보다 좀 산만하네 ㅎ 이러고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엘사한테 감동받고 안나에 과몰입해서 울컥할 일이냐고, 이게.... 

사실은 그냥.. 엘사와 안나 둘 다의 성장이 있는 영화라고 해서, 꽤 좋다고 해서 별생각없이 보러간 거였는데, 좋았다. 엘사가 스스로를 찾을 때 약간 감격했고 프로즌1때도 반했던 안나의 강인함에 또 한번 반했고. 나만 감동받고 눈물 찔끔한 거 아니지 진짜..

 

아직 뭐, 변한 건 없고 나는 여전히 마음만 급박해서 분실물 내것도 아닌데 무작정 파출소 처들어갈 뻔하고, 프로즌의 동물들 보면서 치노 생각을 하고 마음이 아프고 핸드폰은 여전히 소식도 뭣도 없고 그렇지만. 일단 차근차근 할 수 있는 일부터 해봐야지. 하고 적는다. 부디, 무엇이든 어떻게든 상황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 굿플레이스로 좋아하게 된 크리스틴 벨이 안나 역이었다는 걸 알고는 더 사랑하게 됐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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