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당신에게 닿을 때까지, 연극 <프라이드 The Pride>

2014. 8. 21. 03:14Like/Play




연극정보: http://www.thebestplay.co.kr/program/prgm_view_i.asp?pgm_att=CURRENT&idPerf=311

 

 스포일러 포함



연극 <프라이드 the Pride>는 제목 그대로 Pride(자긍심)에 관한 이야기다. 좀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행복에 대한 이야기다. '내 목소리가 당신에게 닿을 때까지... 당신이 당신에게 닿을 때까지...' 참 많은 아픔과 고통과 상처가 있었지만 과거로부터 현재, 미래까지 흐르는 역사 속에서 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의 이야기.

 

 

배경은 1958년 런던과 2014년 런던. 등장인물은 필립(정상윤)과 올리버(오종혁), 실비아(김지현), 남자(최대훈). 58년과 14년을 오가는 시간 속에서 그들은 끊임없이 같은 질문을 던진다


나는 누구인가?


극중에 배우들이 무대를 떠날 때 종종 무대 뒤 쪽의 희뿌옇고 우둘투둘한 거울에 손을 대며 스스로를 바라본다. 하지만 그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희뿌옇게..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거울에 가져다 댈 때 파르르 떨리는 손만큼 어렵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거울이라고 부르기에도 좀 뭐한 그 반사체에 비추는 모습만큼이나 불투명하다. 이때 배우들은 뒤돌아 서있지만 손과 뒤통수 등짝으로도 감정이 느껴질 만큼 연기를 참 잘한다고 느꼈다. 

 

58년의 필립은 실비아와 결혼했고 나름 '평범'한 삶을 사는 남자다.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 던져대며 아내의 손님을 유쾌하게 맞이하는 남자지만, 이 곳(런던이라는 도시, 중에서도 그 마을,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때문에 선택하게 된부동산 중개업자라는 직업)을 벗어나고 싶어하고 예술이라곤 하나도 모른다며 스스로를 재미없는 인간으로 규정하고, 왠지 스스로를 미워하면서도 방어적이고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 때문에 위태로운 남자다

 

58년의 올리버는 그런 그를 찾아온 아내 실비아의 손님. 실비아와 함께 동화책을 만드는 동화작가다. 그는 필립을 처음 본 순간 어딘지 모를 익숙함을 느낀다. 그건 운명? '나와 같은 존재'를 본능적으로 느끼는 그런 것? 필립도 역시 느끼지만 그는 거부한다. 보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감정, 떨리는 공기의 그 느낌을 올리버는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숨겨왔던 자신을 바라본다. 프라이드를 찾고 행복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올리버는 58년에도 14년에도 스스로를 먼저 돌아보고 인정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같은 존재인 필립도 행복하기를 바란다. 난생 처음 만난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에게 함께 인정하고 행복해지자고 말한다.


하지만 필립은 인정할 수가 없다. 사회적으로 금기된 것, 모두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아닌 것'이었으니까. 아니 '아닌 것'이어야만 했다. 도태되지 않기 위해 부서지지 않기 위해 그는 침묵을 택했다스스로의 감정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서 누구보다 격렬하게 거부했고 그 자신 전부를 부정하고 기만했다

 

58년의 실비아는 텅 비어있다. 그녀는 필립을 진정으로 사랑했지만 그들 앞에는 너무나 무거운 침묵만이 있었다. 실비아는 필립의 침묵과 기만에 상처입고 어둠 속에 홀로 서 있는 외로움을 아주 오랫동안 견뎌야만 했다. 하지만 오히려 필립에게 그가 혐오하는 어떤 것의 정체를, 필립 그 자신을 돌아보게 하려고 애썼다. 그녀도 껍데기뿐인 사랑이 아니라 공기가 진동하는 사랑을 하고 그런 사랑을 받고 싶었지만 그녀는 상처입은 자신보다 침묵과 기만으로 스스로를 죽이고 있는 필립이 먼저 행복해지기를 빌었다. 남편과의 관계가 드러난 올리버에게도 당신은 소중하다고 말해주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시간이 섞이고 2014년 오늘의 그들이 등장한다. 14년의 필립과 올리버는 공식적인 연인관계다. 필립은 단정한 느낌이지만 58년과는 다르게 자유로운 사진작가. 올리버는 아주 요물이다ㅋ 실비아는 (아주 다행히도) 눈물날만큼 행복한 사랑을 하고 있는 이성애자. 세상이 변했고 동성애는 58년도에 그랬던 것처럼 죄악시되지 않는다, 특히 런던에서는. (14년도의 실비아는 이렇게 외친다. "그 남자는 정말 잘생기고 날 사랑하고 섹시하고, 게이가 아니야! 이게 런던에서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아?" - 잘생긴 남자는 유부남이거나 게이라는 진리ㅎ_ㅎ) 하지만 여전히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유효하다. 

 


올리버는 섹스 중독이다. 상대의 얼굴도 보지 않고 말 한마디 섞지 않으며 그저 빨기만 하는 중독자. 그 때문에 오랜 연인 필립은 그를 떠난다. 시대는 변했지만 오랜 고리는 끊기지 않았다. 여러 대사들과 단어들이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중첩되면서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고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참 매력적인 부분. 그들은 여전히 서로가 공명하는 것을 느끼고 자기 자신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상처입히고 상처입는다. 현재는 과거의 연장선상에 있다.

 

58년의 필립은 58년의 올리버를 부정하며 말한다. "당신의 영혼은 길을 잃었어요."

14년의 올리버는 14년의 필립이 떠난 뒤 쓸쓸해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영혼이 길을 잃은 것 같아." 

58년의 올리버는 스스로를 인정할 수도 올리버를 거부할 수도 없어 그를 짓밟아버린 58년의 필립을 떠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당신을 안다고 생각했어요"

14년의 필립은 섹스 중독인 14년의 올리버를 떠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를 안다고 생각했어."

 

 

나의 존재에 대한 물음, 너와 나의 공명에 대한 질문. 58년에는 어긋나버렸고 지독히도 산산히 조각나버렸다

 

 

58년의 필립은 병원에 찾아간다. 의사는 묻는다. "성희롱을 당한 적이 있죠?" 아니요. "솔직히 대답해야 해요." 

그리고 그는 필립이 이야기하는 차마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감정에 대해서는 전혀 대답하지 않고 이렇게 묻는다. "그와 성적인 관계를 했나요? 당신은 그와 성적인 판타지를 아직 가지고 있나요? 흥분했나요?"  그건 의사의 목소리일 뿐 아니라 그 사회의 목소리였고 필립이 스스로에게 되뇌는 목소리였다. 그건 '목소리'가 아니라 '침묵'이었고 무자비한 폭력이었다. 극 중 가장 끔찍했던 장면..

 

필립은 구토요법이라는 끔찍한 곳까지 스스로를 몰아넣었다. 그 '치료'를 시작하기 전 의사가 문득 물었다. 여기까지 오게 된 계기, 치료를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냐고. 필립은 대답한다. 잊기 위해서라고그리고 의사는 답한다. "그건 다 그런 것 아닌가요"

 

이 장면이 그렇게도 뇌리에 박히더라. 의사가 했던 말 중에 유일하게 옳았던 말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다. 그건 다 그렇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흐르고 그 침묵 속에 숨겨진 필립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고, 정말 잊고 싶지 않았다고

언젠가 58년의 실비아가 말했다. 침묵은 결국 스스로를 죽일 것이라고. 필립은 올리버에게 침묵을 강요했고 스스로에게도 침묵을 강요했다

 

 

58년의 필립은 58년의 올리버를 거부했고 부정했다. 그 균열이 14년의 올리버까지 이어져 그 섹스 중독을 만들었다. 침묵과 부정이 현재까지 이어져 트라우마가 되고 DNA가 되고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결국 어긋나버렸던 58년과 다르게 14년의 그들은 서로 이야기한다. 그들 사이의 오래된 이야기,  '역사'를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고 서로를 돌아본다돌고 돌아 서로에게 사과하고 서로를 용서한다. 내 목소리가 당신에게 닿을 때까지, 당신이 당신에게 닿을 때까지 돌고 돌았던 그들은 프라이드를 가지고 행복을 본다

 

프라이드 페스티벌을 바라보며 웃는 14년의 필립과 올리버 뒤로 58년의 실비아가 나타난다. 58년의 필립을 떠나는 실비아는 필립과 올리버가 꿈결같이 들었던 그 목소리로 말한다. "괜찮아요, 괜찮아질거예요." 

 

나는 실비아가 정말 좋았다. 58년의 실비아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떻게??'라는 말이 턱밑까지 차오를 정도로 마음이 넓고 현명하고 따뜻하다, 그래서 터무니없이 너무나 외로웠던 인간이었던 실비아. 연기도 잘하고 배우로서 행복했지만 필립의 말에 따르면 감정에 쉽게 전염되어서, 배우를 내려놓고 삽화가로 살았던 그녀

14년의 실비아 역시 현명하고 따뜻하고 인간을 인간으로 보아주는, 게다가 이번엔 행복하기까지한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14년의 실비아는 멋지게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주연을 따내는 겁나 멋진 배우다. 보는 내내 실비아가 더 행복하고 그 행복이 사랑스럽기를 계속계속 바랐다. (그리고 실비아를 연기한 김지현 배우, 정말 너무 무지하게 좋다. 어쩜 이렇게 멋지게 연기를 할까!! 부럽다!)

 

초반부에는 그렇게도 불안해하며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려고 애쓰던 인물들이 극의 마지막에는 서로의 손을 꼭 잡고 행복하게 웃는다. 그들은 더이상 불안하게 희뿌연 거울에 스스로를 비춰보지 않는다.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아주 화창한 날씨에, 파릇파릇한 잔디 위에서 무지개빛 프라이드를 지켜보는 그들의 모습에 울컥 눈물이 치밀었다. 행복해보이는 그들을 바라보며 진심으로 그들이 행복하기를 바랐고 나까지도 행복해지면서 커튼콜에 정말 온힘을 다해 박수를 쳤다. 

 

 

그리고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

 

14년의 올리버는 14년의 필립이 말한 '역사'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뭔가가 터지는 듯한 감격을 느끼는 듯했다. 그건 필립의 깊은 사랑이고, 58년부터 계속 된 어떤 상처를 치유해주는 사과였고 개인 올리버가 아니라 수많은 올리버들의 존재를 말해주는 단어였다. 그로 인해 필립과 올리버는 오랜 고통을 끊어낸다.

 

그 역사라는 단어를 곱씹으면서 나는 이 문장이 떠올랐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The Personal is Political"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문장이다. 캐롤 하니쉬의 페미니즘 슬로건인데 그건 모든 불평등에 저항하는 슬로건이란 뜻이다. 올리버와 필립은 개인이 아니다. '올리버들과 필립들'의 침묵과 자기부정, 기만과 상처는 오롯이 개인의 몫이 아니다. 그건 사회적인 것이다. (그리고 사적인 영역이 정치의 장이 된다.)

 

극중에 14년의 실비아가 게이 친구를 원하는 기집애들에게 불만을 토로하는 부분이 있는데 아주 매우 겁나 통쾌하다혹은 찔리거나. ㅎㅎ 정확히 대사가 기억이 안나는 관계로 내 머리속에 떠다니는 단어들로 재구성해서 써보자면 이런 내용이다(아마..): 걔네는 너를 도매가로 팔아넘겨. 너의 성적 취향, 니 몇 가지 특성들로 너를 안다고, 이해한다고 말하는 거야. 진짜 너 그 자신에 대해선 안 본다구

 

동성애 코드 작품들은 늘 논란이 된다. 동성애를 코드로 해야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다거나, 뻔한 노림수라거나, 뭐 기타등등의하지만 이것 역시 동성애를 도매가로 팔아넘기는 거다. 그런 것도 있겠지. 하지만 그걸 왜 '동성애'라는 도매가로만 말하는가이성애 코드(!!) 작품에서는 다양한 주제의식을 뽑아낼 수 있으면서.

동성애자를 이해한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동성애자를 이해할 수 없다.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동성애자들은 너무 많고 그들은 모두 다른 개별적인 사람들이니까. 그리고 차별은 취향이 아니다분명히.

 







- 그리고 여타 뱀다리들.

 

1. 침묵했던 사람들, 고통받았던 사람들 - 수많은 성 소수자들 - 그리고 그건 아직 현재진행중 - 비단 성 소수자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걸 나는 안다.

1-1. '수많은 성 소수자들'이라는 표현 완전 모순적이야

 

2. 마지막 장면에서 필립과 올리버가 바라보는 레이디 가가 머리를 하고 앞면이 망사인 팬티를 입은 아흔 다섯 쯤 되어 보이는 '생존자' 어쩌면 58년의 올리버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58년의 올리버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가 '생존'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3. 엔딩곡이 정말 무지막지하게 어마무시하게 좋다. 프로그램북을 보니 우리나라 음악디자이너가 작곡한 곡이던데 아 진짜 너무 좋은거 아니야? 음원으로 듣고싶다. 덧붙여서 대본집도 나왔으면 좋겠다. 행복해지고 싶을 때마다, 그리고 그 행복에 대해 생각하고 싶을 때마다 보고 싶어서. 그리고 대사 하나하나가 너무 멋지잖아. 한번 후루룩 흘리기엔 너무 아까운 단어들이다.

 

4. 멀티맨으로 활약한 최대훈 배우의 연기도 정말 좋았는데 본문에는 못 담았다. 강렬한 나치와 마냥 웃어넘길 수 없는 이야기를 하던 '남자'. 차가운 시선의 의사. 그리고 편집장. 이건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편집장이 해리 삼촌의 평화롭고 따뜻한 눈을 묘사할 때 바로 어제 엄마와 이야기했던 우리 종조할머니가 떠올랐다. 맑고 맑고 욕심이 없었다던 고운 우리 할머니. 편집장의 눈동자가 정말 사랑했던 이를 떠올리는 것 같아서 왈칵 눈물이 났다. 할머니 보고 싶다.

 

5. <푸르른 날에>에서 충격적인 연기를 하고 충격적인 인상을 남긴 이명행 배우가 필립역에 더블 캐스팅이다. .. 재관람은 확정.. 다만 좀 천천히. 오늘의 이 느낌이 빠져나가는 것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