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이길보라

2021. 1. 25. 15:39Like

'코다는 농인 부모 아래에서 태어난 청인 자녀를 뜻하는 단어다. 나는 이 단어를 이길보라 감독의 칼럼에서 처음 봤고, 내가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던 정체성에 대해 생각했다. 이길보라 감독은 농인 부모의 시선으로 담은 세상을 <반짝이는 박수 소리>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로 담아냈다고 한다. 농인들은 박수를 소리 내어 치지 않는다. 양손을 반짝반짝하는 모양으로 흔드는 것이 농인들의 박수 방식이다. 이길보라 감독의 이력을 몇 줄 읽는 것만으로도 내 세상은 이렇게 넓어진다. 이 책의 부제는 삶의 지도를 확장하는 배움의 기록이고 이길보라 감독의 첫 다큐멘터리는 거리에서 삶을 배웠던 청소년 시기의 경험을 담은 로드스쿨러. 감독은 그렇게 세상을 배우며 삶을 넓혀왔고 나는 고스란히 그 기록의 역사를 읽으며 나의 지도를 넓힌다.

이 에세이는 이길보라 감독이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도전하고 길에서 세상을 배우며 부딪치고 깨지며 스스로의 세상을 넓혀가는 이야기다. 낯선 곳으로 일주일 여행만 다녀와도, 낯선 곳에서 온 이들과 잠시만 대화를 나눠봐도 세상은 종종 넓어진다. 하지만 있던 곳으로 돌아오고 그 감각을 잊는다면 세상은 도로 좁아진다. 고정관념과 편견은 물론이고, 습관과 생각의 한계, 관습과 규칙을 깨고 세상을 넓히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이길보라 감독은 나름대로 고정관념을 깨고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세상으로 배움을 추구하러 나갔고, 농인 부모에게 쏟아지는 세상의 편견을 지켜보고 자랐으며, 본인이 영화 유학을 통해 얻을 결과가 세상에 기여할 예정이므로 세상의 도움을 받기로 결심하고 유학비 크라우드 펀딩을 열만큼 보통은 아닌 젊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었지만, 그조차도 영화를 배우러 간 네덜란드에서는 자신의 벽에 부딪혀 괴로워한다. 이길보라 감독은 네덜란드가 한국보다 낫다고 말하지 않았고 그럴 의도로 읽히지도 않지만, 그조차 낯설어했던 네덜란드 영화 학교에 모인 사람들의 대화와 생활, 학습 방식을 읽다 보면 조금은 서글퍼진다. 타인의 삶을 존중하고 다양한 정체성에 대해 이미 배우고 배려하는 것이 당연한 사람들, 그로 인해 억압과 고통이 아닌 즐거움과 호기심을 동력으로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라니. 그런 세상에서 만들어지는 예술과 그런 세상에서 자라날 아이들은 어떤 모습일지, 가질 수 없는 것을 동경하는 마음으로 약간 부러워졌다. 이길보라 감독은 나름대로 다양한 경험을 하며 자라왔고 한국에서 나름대로 자유로운 분위기라는 한예종을 졸업했음에도 전혀 다른 문화에서 자라온 사람들과 스스로의 예술을 돌아보고 탐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고 말한다. 게다가 그 혼자만 동양인 여성에 언어조차 자유롭지 않았다. 토론 시간에 말 한마디 하지 못해 집에 오는 길에 눈물을 삼키기도 하고 엄격한 한국 사회에 익숙해진 탓에 스스로 가혹하게 굴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아버지의 말 한마디를 떠올린다. ‘괜찮아, 경험모든 것이 다 경험이고 경험이 쌓이면 분명히 어떤 것들은 달라진다. 그도 그렇다. 수업 시간에 의견 한 마디 내지 못했던 그가 본인의 경험과 시선을 분명히 발표해내기도 하고 새로운 방법론을 시도하며 자신의 작업 틀을 깨기도 했다.

그의 세상이 그렇게 넓어지는 것을 읽으며 나도 내 세상이 넓어지던 때를 생각한다. 잘 하지 못하는 내 모습이 부끄러워서 할까 말까 망설이고, 망신당하지 않기 위해 가만히 있는 것을 택하고, 나아가기보다는 보수적이고 싶을 때가 있고 그때에 약간의 용기(혹은 눈 질끈)를 내어 일단 하면, 그렇게 내 세상이 넓어진다는 것. 그러니 그의 삶의 태도에 공감할 수 밖에 없다. 길에서 배움을 구하는 일, 평생 배움을 추구하며 삶의 지도를 조금씩 확장해가는 일은 비록 가끔은 나 자신을 초라하게 느끼게도 하겠지만 결국은 내가 더 나아지고 더 다양한 세상을 이해하게 해 줄 것이라고.

지금 내가 마주한 세상이 가끔은 불편해도 안락하게 느껴지겠지만 안전지대(comfort zone)에서 벗어나 새로움을 계속해서 배워야겠다고, 더 넓은 삶을 만나게 될 나를 위해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