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나처럼 살지 마라 / 박노해

2015. 1. 29. 15:01Like

넌 나처럼 살지 마라 / 박노해

 

아버지,

술 한 잔 걸치신 날이면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어머니,

파스 냄새 물신한 귀갓길에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이 악물고 공부해라

좋은 사무실 취직해라

악착같이 돈 벌어라


악하지도 못한 당신께서 

악도 남지 않은 휘청이는 몸으로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울먹이는 밤


내 가슴에 슬픔의 칼이 돋아날 때

나도 이렇게는 살고 싶지 않아요

스무 살이 되어서도

내가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꿈을 찾는게 꿈이어서 억울하고


어머니, 당신의 소망은 이미 죽었어요

아버지, 이젠 대학 나와도 내 손으로

당신이 꿈꾸는 밥을 벌 수 없어요


넌 나처럼 살지 마라, 그래요,

난 절대로 당신처럼 살지는 않을 거예요

자식이 부모조차 존경할 수 없는 세상을

제 새끼에게 나처럼 살지 말라고 말하는 세상을

난 결코 살아남지 않을 거예요


아버지, 당신은 나의 하늘이었어요

당신이 하루아침에 벼랑 끝에서 떠밀려

어린 내 가슴 바닥에 떨어지던 날

어머니, 내가 딛고 선 발밑도 무너져 버렸어요

그날, 내 가슴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공포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새겨지고 말았어요


세상은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고

그 어디에도 기댈 곳도 없고

돈 없으면 죽는구나

그날 이후 삶이 두려워졌어요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알아요, 난 죽어도 당신처럼 살지는 않을 거예요

제 자식 앞에 스스로 자신을 죽이고

정직하게 땀 흘려온 삶을 내팽개쳐야 하는

이런 세상을 살지 않을 거예요

나는 차라리 죽어 버리거나 죽여 버리겠어요

돈에 미친 세상을, 돈이면 다인 세상을


아버지, 어머니,

돈 없어도 당신은 여전히 나의 하늘입니다

당신이 잘못 산게 아니잖아요

못 배웠어도, 힘이 없어도

당신은 영원한 나의 하늘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다시 한번 예전처럼 말해주세요

나는 없이 살아도 그렇게 살지 않았다고

나는 대학 안 나와도 그런 짓 하지 않았다고

어떤 경우에도 아닌 건 아니다

가슴 펴고 살아가라고


다시 한번 예전처럼 말해주세요

누가 뭐라 해도 너답게 살아가라도

너를 망치는 것들과 당당하게 싸워가라고

너는 엄마처럼 아빠처럼 부끄럽지 않게 살으라고

다시 한번 하늘처럼 말해주세요


_박노해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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