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과 윈도우 사이

2020. 4. 15. 15:20In the Box

회사에서는 맥을 쓴다. 새롭게 익힌 단축키들이 제법 손에 빨리 익었다. 집에 돌아와서 내 컴퓨터를 켜면, 고새 익숙해진 새로운 단축키를 누르고 있다. 윈도우를 20년을 넘게 쓴 거 같은데, 고작 몇 달 썼다고 세상에나. 적응해야 하는 것에 적응하다 보면 익숙한 것마저 가끔 잊게 되고, 익숙한 것을 잊어버리는 기분에 허둥대다 보면 손에 슬슬 익는다고 생각했던 것도 아직은 낯설다는 걸 깨닫는다. 손에서 마구마구 뭔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면 그냥 가만히 서 있게 되는 것이다. 요즘의 나처럼.

내가 좋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 멀고 먼 다른 장소에 산다는 것, 그러니까 만나지 못하고 전화나 노력해봤자 영상통화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아직 그렇게까지 힘들진 않은데, 다른 시간에 산다는 게 조금 더 힘들다. 같은 날짜, 시간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건 같은 감성을 공유하지 못한다는 것, 같은 사건을 겪기 힘들다는 것, 누군가는 기다리고 누군가는 조급해진다는 것. 내가 출근을 준비할 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잘 준비를 하고, 내가 퇴근을 하고 하루를 마무리하며 그들이 보고 싶어 질 때, 그 사람들은 하루의 중간을 한창 열심히 살고 있다. 오늘도 겨우 영상통화를 할 수 있었을 때는 친구들은 시끄러운 식당에서 식사를 기다리고 있고 나는 밤이 늦어 시끄럽게 통화하기 눈치가 보이는 시간. 생일 축하만을 간신히 전하고 전화를 끊자 마음이 허했다. 이런 것들을 계속 버티고 지낼 수 있을까? 내가 살던 곳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오래도록 살아갈 결심을 정말 내가 내릴 수 있을까? 같은 시간대를 사는 친구들은 다른 시간대를 사는 나 하나를 계속 기억하고 챙겨주기 어려울 거고, 나는 계속 기다리고 외로워할 텐데 내가 정말 이런 것들을 견뎌내고 무뎌지고 그렇게 멀어지는 것을 감내할 수 있을까. 어떤 방식으로든 익숙해지겠지만, 그게 서운해진다면 이건 어떻게 다뤄야 하는 걸까, 고민이 된다.

오늘은 친구들의 영상통화를 기다리면서 넷플릭스 <그리고 베를린에서 Unorthodox> 4편을 모두 봤다. 뉴욕 브루클린, 내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Rent 혹은 예술가 그 정도인데 그 뉴욕의 브루클린 안에 저렇게 폐쇄적인 커뮤니티가 있다니, 이게 현실이라니 그게 좀 충격이었고. 에스티가 태어날 때부터 단단히 온 몸과 정신에 묶여있는 커뮤니티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길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벅찼고 아름다웠다. 단순히 요약할 수 없는 이야기. 모든 이야기는 디테일에서 그 힘을 발휘한다. 윌리엄스버그의 하시디즘 커뮤니티의 디테일한 재현과 에스티의 생각, 에스티의 눈빛과 표정, 그리고 에스티의 결정이 너무 좋았다. 유대인이란, 참 역사의 아이러니 그 자체인 것 같다는 생각도 잠깐. 그리고 모든 여성은 세상 곳곳의 커뮤니티에서 각각의 모습으로 그러나 같은 모습으로 억압당하고 있다는 것도 다시 떠올리고. 억압적이지만 벗어나기 힘든 본 커뮤니티에서 떠나 새롭지만 낯설고 불친절한 새로운 곳에서 삶의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는 에스티의 모습에서 나와 친구들과 어떤 사람들의 모습을 투영해서 생각해보기도 하고. 커뮤니티에서 랍비의 명을 받고 에스티를 잡으러 온 사람이 에스티에게 총을 남기면서 하는 말이 섬뜩했다. 여기서 어떻게 살려고 그래, 우리는 커뮤니티가 있어, 어차피 돌아오게 되어있어, 여기서는 낯설고 힘든 삶만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돌아오지 않는다면, 내가 널 쏘는 게 아니야. 널 쏘게 되는 건 너야. 이 얼마나 강력하고도 늘 효과적이었던 저주인지. 네 선택이 너 스스로를 쏘게 될 것이다. 삶은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종종 가혹하고 가끔은 무너지기 마련이지만, 특히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강력한 사슬이 던져지는 걸 많이 봤다. 에스티는 스스로를 쏘지 않았지만, 나는 에스티가 그럴까봐 혹은 그 사람들이 다시 에스티를 쏘러올까봐 무서웠다.

밖에 잘 못 나가니까 더 외롭고, 열심히 지내다가도 마음이 힘들다. 

사실 그런 생각을 한다. 코로나가 없었고 열심히 놀러다녔으면 아마도 한참 후에나 이런 생각을 했겠지. 놀기 바쁘고 싶었는데. 

오늘은 외로워서 쓴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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