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지만 순식간에

2020. 2. 20. 10:40in Vancouver

느리지만 순식간에 흘러가는 하루하루들. 벌써 밴쿠버에 온 지 22일이 지났네

오후에 방에 들어온 햇빛 모양이 예뻐서 웃을 정도로 하루하루가 아직은 평화롭다.

물론, 슬슬 돈이 떨어져 가고 있고 슬슬 일을 구해야 해서 조금씩 맘이 무거워지지만, 시동 거는 게 여전히도 당연히도 쉽지가 않다. 그래도 억지로라도 첫 발을 떼고 생각은 그다음에 하자는 마음으로 움직이고 있다.

지난주에 다녀온 보드게임 밋업도 그런 마음으로 다녀왔다. 언어 교환 밋업도 아니고 보드게임 밋업이라니, 대화도 자유롭지 않은데 게임을 할 수 있을까 조금 걱정했지만 일단 신청을 했다. 신청을 했으니 일단 시간을 맞춰 나갔고, 나갔으니 모임 장소인 펍에 들어갔다. 그런데 조금 일찍 온 탓인지 모임 장소라는 펍 2층에는 보드게임을 하는 사람은 안 보이고 전부 끼리끼리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뭔가, 다가가기가 조금 어려운 분위기에 당황해서 호스트를 찾아볼 생각도 안 하고 펍에서 나왔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 게임을 시작하기 앞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것 같은데 당황하면 확실히 눈 앞이 흐려진다. 

그렇게 나와서는 그 동네를 뺑뺑 돌았다. 조금 늦게 가면 사람이 많을 거고, 아마 게임을 하고 있을테니 좀 더 쉽게 끼어들 수 있겠지 싶은 마음 반, 그냥 집에 갈까 하는 마음 반으로 계속 계속 걸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일단 들어가는 보자, 들어가서 게임 한 판은 해보자, 그래도 별로면 그때 집에 가자. 누군가에게는 별 거 아닌 일일 수도 있겠지만, 꽤 오래 걷고 오래 설득한 끝에 설득을 당해서 마음을 다잡고 다시 펍으로 갔다. 사실, 며칠 전에 만난 일본 친구를 초대했는데 그 친구가 오기도 전에, 들어가 보기도 전에 포기하고 가는 건 약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아무리 내가 겁쟁이라지만!

결과적으로 그날 밋업은 대성공이었다. 어색하게 들어가 어색하게 호스트와 인사를 하고, 혼자 앉아있던 사람과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더니 사람들이 조금씩 우리 테이블로 왔고 게임을 시작했다. 처음에 만난 사람은 정말, 정말 정말 별로였지만 다행히도 그 후에 모여든 사람들은 모두 유쾌했고, 게임도 너무 재미있었다. 우린 몇 시간이나 볼이 빨개지도록 집중하며 게임을 했고 게임을 끝내고선 같이 맥도널드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인스타그램 계정을 공유하고 헤어졌다. 

갑자기 긍정적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요즘은 어쨌든 하는 것이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리고 아직까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했을 때 좋은 결과를 얻고 있다. 그때 안했으면 어떡할 뻔했어, 그런 마음이 들 정도로. 매번 첫 발을 떼는 것이 어렵고 가끔은 눈 딱 감고 한다는 심정으로 하기도 하고, 그 다음 다음 스텝도 쉽지 않을 때도 있지만, 움츠러 들려는 마음을 설득해가면서 조금씩 조금씩 해보려고 하고, 또 그게 즐겁기까지 하다. 큰일은 아니어도 왠지 성취감까지 느껴진달까.

이건 내가 한 번 크게 도망쳐본 적이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름 몇 년의 경험으로 촉이 좀 생겼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나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되었기 때문일까. 아마도 셋 다, 그리고 다른 이유가 있다면 새로운 곳에서 뉴커머로 시작한다는 특수 조건 때문일지도 모르지. 어쨌든 지금의 내 태도가 나는 꽤 만족스럽다. 그리고 꽤 명확하게 기준을 세우고 있다는 점도.
만약,
앞으로 어디에서든 그다지 날카롭지 않은 내 촉이, 이건 아니다! 라고 판단한다면 나는 자책 없이 도망칠 것이다. 지체 없이는 좀 어렵겠지만, 자책은 없을 거야.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충분히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과 그렇진 않지만 조금 두려워서 도망치고 싶은 일을 구분하게 됐다. 어떤 일들은 그냥 어설퍼 보이는 게 싫다거나 무시당하는 게 싫어서 도망치고 싶다는 걸 인정한다. 어릴 때부터 그런 일들 앞에서 도망치지 말아야 한다고 배웠고, 그런 일들 앞에서 가끔은 버텨보고 가끔은 도망치기도 했지만 요즘은 그런 일을 대하는 내 모습을 조금 더 직시하게 된다. 나를 좀 더 들여다보면서 내 기준을 세우고 그렇게 행동하는 일,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 해나가야 하는 일이겠지. 

구직 활동에서도 진도가 팍팍 나가면 좋을텐데 그건 또 그렇지가 않네. 그래도 그렇게 마음먹은 김에, 그렇게 조금씩 해내고 있다는 걸 인지한 김에 이력서를 캐나다식으로 업데이트하고 몇 군데 일단 지원도 했다. 시험 삼아 넣어본 곳에서 바로 연락이 와서 준비 없이 전화 인터뷰까지 후다닥 해버렸는데, 너무 준비 없이 기회를 날린 게 못내 씁쓸하긴 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렇게 했으면 됐는데, 자다가 이불도 뻥뻥 차고. 아쉬워라.
첫 발은 뗐는데 그다음 스텝도 너무 무거워서 좀 주저앉아 잠깐 한눈이나 팔고 싶기도 하다. 그래도 어차피 해야 하는 거, 이왕 스스로를 뿌듯해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하는 게 낫겠지! 첫 발을 뗀 후 따라올 수많은 과정들은 일단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그래야 한 발자국씩이라도 뗄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