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 들만하면 떠나기의 연속

2020. 3. 31. 14:31in Vancouver

생각해보니 이게 벌써 세 번째 이사다. 첫 숙소에서 한 달 임시 숙소로, 한 달 임시 숙소에서 오래 살 집이라고 생각했던 두 번째 집으로. 그리고 그 집에서 지금 이곳으로. 임시 숙소에서 지낼 땐, 한 달 후에 떠날 거라 생각하고 하우스메이트들과 그리 살갑게 지내진 않았는데도 떠날 때 괜히 아쉬웠다. 하우스메이트, 동네, 집과 내 방에도 정이 이제야 드는데 떠나는구나, 하며 아쉬워했다. 

두 번째 집은 오래 콕 박혀있을 생각으로 들어간 집이었지만, 세 가족이 사는 집이라 친해질 일이 별로 없겠다 생각했다. 그렇지만 혼자 타국에 나온 젊은이가 눈에 밟히시는지 할머니는 김치며 무말랭이 같은 반찬들을 자주 해서 주시곤 했다. 먹을 거에 무장해제된 건지, 할머니에게 약한 건지 (우리 할머니 보고 싶다) 어쨌든 갑자기 할머니랑 친해졌고, 좋았다. 원래 어른들이 이런저런 참견을 하는 걸 잘 못 받아치는 성격인데 할머니께는 손녀처럼 굴었다. 할머니가 가끔 하염없이 늘어놓으시는 남 이야기도 평소라면 질색해 빨리 자리를 뜨고 싶어 했을 텐데 듣다 보니 정말로 흥미로워서 열심히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손녀딸 분도 가끔 내 방 문을 두드리고 햄버거, 타코, 빵 같은 간식을 전해주곤 했다. 아저씨가 사오셔서 전해주라고 한 거였다. 역시 먹을 것에 무장해제되었고, 고마웠다. 

코로나만 아니었으면 정말 잘 지낼 수 있었을텐데. 이삿짐을 싸면서 하염없이 그런 생각을 했다. 어차피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면 그런 식으로 가정하지 않기로 했는데 이 집을 떠나기가 너무 아쉬워서 계속 코로나만 아니었으면, 의 상황을 상상했다. 회사도 주 5로 정상적으로 다니고 있었을 거고, 월급도 괜찮았을 거고, 친구들이랑 차를 빌려 멀리 놀러도 갔을 거고, 이 집에서도 잘 지냈겠지. 다른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겠지만 다 잘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일 테니, 결국 코로나만 아니었으면! 천재지변을 원망하면서 꾸역꾸역 짐을 쌌다. 떠나기 싫으니 짐 싸기가 더 싫었다. 

처음에 방을 빼달라는 소리를 들었을 땐 충격이 컸고, 막막했고, 너무하다 싶었지만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고 잘해주셨던 게 고마워서 웃는 얼굴로 인사하고 나왔다. 마음은 상했고 이사 갈 집은 썩 맘에 드는 곳은 아니지만, 나도 이사 비용 청구했고, 그래 뭐 천재지변을 인간들이 어떡하겠어. 할머니는 곧 한국으로 돌아가신단다. 비행기에서 조심하셔야 할 텐데, 마음이 쓰인다. 오래 살 생각으로 무장해제를 너무 빨리 해서 정이 많이 들어버렸다. 정이 들만하면 떠나고 헤어지는 일에 다들 마음을 많이 쓰다가 쓰다가 빗장을 걸어 잠근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정말로 그런가 보다. 정은 정말 아차 하는 새에 들고 이별은 너무 잦고 빠른 거 같다.

 

안녕, 내 두번째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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